
[프리뷰] 빛의 화가 모네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2007년 6월6일부터 9월26일까지
Claude Monet
인상파 미술의 아버지 클로드 모네(1840~1926) 말년의 모습
<클로드 모네의 삶의 여정>
1840년 파리에서 출생 1857년 르아브르에서 처음 그림을 선보이다 1859년 파리에서 피사로를 만나다 1861년 알제리에서 군복무하다 1862년 파리 글레이르아틀리에 들어가 르느아르, 시슬레, 바질 만나다 1870년 카미유와 결혼 아들 장을 얻다 1879년 부인이 죽다 1883년 지베르니에 정착 세잔을 만나다 1892년 알리스와 재혼하다 1908년 런던을 여행하다 1911년 알리스가 사망하다 1923년 모네 거의 시력을 잃어가다. 다시 나아지다 1926년 지베르니에서 사망
인상파라는 말은 모네가 1874년 르아브르항구를 그린 <인상 해돋이>에서 나왔다는 건 대부분 다 알고 있다.
<인상_해돋이>
또한 그가 추상파를 열어주었다는 것도 그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은 많이 알고 있다.
모네의 특이한 기법인 가벼운 터치의 병렬과 그림이 점차 단편화되고 원근법도 무시하는 이차원적이 되면서 게다가 말년에 백내장으로 시력이 약해지면서 그는 더 추상적 경향을 보인다.
<생드니 거리 6월30일 축제 1878년> 추상화시대를 예고하는 작품
인상파를 열고 추상파를 또한 열어준 화가이니 그는 미술사에 길이 남을 작가임에 틀림없다.
그는 수시로 변하는 순간의 빛을 포착하여 공간예술인 미술에 시간개념을 도입하여 미술에 대변혁을 가져왔다.
모네는 그림에서 '첫인상', '첫느낌', '첫순간' 같은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세계를 중시했다.
그의 그림 속에 담긴 각별한 눈부심에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은 그 순간의 아찔한 전율이 그림에 담겨있고 그 경이로운 경험을 맛보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르장테이유 산책>
그는 미술의 형식이나 기술이나 규칙에서 얻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세상을 열었다.
<노란 아이리스> 모네가 이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 본 빛이 관객 마음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다.
그의 빛과 색과 물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이전의 그 어떤 그림과 비교가 안 된다. 전혀 새로운 세계였다.
또한 야외에서 그림을 그린 다는 것은 당시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빛은 잠시도 같지 않고 매순간 변화하고 달라진다는 점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그의 그림은 대개 물에 잠겨있다. 어려서 본 물과 바다의 인상이 그에게 그렇게 강력해서 작용한 것 같다.
<수련연작> 빛의 변화에 따라 색채가 이렇게 다양하고 황홀하게 변주될 수 있다니 놀랍다. 마치 빛과 색과 물이 하나의 앙상블로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것 같고 대향연을 베풀어주는 것 같다
모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늘 물위에 떠 있고 싶었다"
5살 때 이사 간 르아브로 항구에서 센 강줄기에 놓여있는 아르장테이유, 베테이유, 프와사, 대서양 연안 푸르빌, 옹플뢰르만이 아니라 런던의 템스 강, 지중해 앙티브와 이탈리아 아드리아해의 베니스 그리고 생을 마감한 지베르니 정원과 연못까지 그의 그림은 온통 물로 채워져있다.
현재 모네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는 있는 곳은 파리 불로뉴숲 근처에 자리 잡은 <마르모탕(Marmottan)미술관>이다. 1934년 설립되어 1966년 모네의 둘째아들 미셸이 부친의 작품을 기증함으로 인상주의미술관이 되었다.
모네는 마흔살까지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지만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버리지 않았고 매일 수십 개의 캔버스를 들고 야외에 나가 수시로 변화는 빛의 반사현상을 놓치지 않고 부단히 그렸다.
<런던 국회의사당>
이런 집념이 루앙대성당(1880~1890)과 런던 국회의사당(1899~1901) 연작을 낳았고 이것이 기초가 되어 그 유명한 <수련연작>의 결정체를 만들어냈다.
<루앙 대성당> 순간적 빛의 변화를 포착하기 위해 시간대 별로 많은 연작을 그리다
그에게 있어 빛은 그림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그림 그 자체였다.
그는 그와 뜻을 같이하는 르누아르를 만나 평생지우가 되었고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다.
그밖에도 시슬레와 그의 후원자 역을 했던 바질과도 친했다.
그는 그의 모델이기도 했던 카미유와 결혼했으나 아내는 두 아들을 남겨놓고 안타깝게 죽고 만다. 그의 지독하게 아픈 슬픔도 모네는 그림에 담았다.
<모네부인의 임종>
그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의 고향이기도 한 지베르니에 내려갔고 그 곳에서 거기서만 볼 수 있는 정겹고 신비하고 특별하고 아름다운 정원, 연못, 늪 등을 그렸다.
거기서 생생하고 순수한 빛이 표출하는 찬연한 순간의 빛의 세계를 창출해냈다. 또한 고향에서 연출된 자연을 즐겨 그렸다.
모네는 지베르니가 지닌 색채에 매혹되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이토록 맑고 빛나는 색채를 맛보지 못했다 "
그는 당대풍 아카데미즘 그림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혐오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런 만큼 그의 화풍은 당시로는 독창적이고 획기적이었다. 피사로, 세잔과 친하게 지내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모네 정원에 핀 꽃들> 빛과 색채가 주는 눈부심에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다
19세기 유럽사회의 대변혁은 결국 미술에서도 관전인 살롱전에서 독립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그 시대의 정신을 제대로 담을 수 있는 것은 인상파뿐이었다.
모네는 그림이란 개인적 취향과 개성이 반영된 창조물이라고 보았다. 프랑스혁명 이후 유럽사회에 팽배한 시민의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생라자르 역 1877년> 사회변혁기였던 산업시대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금방 사라지는 증기기관차의 연기를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그 인상을 남겼다
1880년부터 그의 그림을 주목을 받았고 그를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모네는 1892년 알리스와 재혼했다. 알리스는 미술수집가이고 갑부인 오슈데의 아내였으나 남편이 잃자 모네와 다시 결혼했다.
<일본식 정원>
모네는 이렇게 평생 수시로 변화하는 빛을 순식간에 포착하여 표현하는데 온통 관심을 쏟았다.
1893년부터 물의 정원(Jardin d'eau) 수련연작을 그리기 시작했고 <하얀 수련(1899)>, <일본식 다리(1899)>, <수련연작(1914,1917)> 등이 그의 말년의 대표작이다. 그밖에도 2,000여점의 작품을 남겼다.
<봄 풍경> 빛의 변화로 수시로 달라지는 색과 빛의 강도가 화폭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 같다
그는 풍경을 그냥 그리는 것이 아니라 <봄 풍경>에서 보듯 풍경이 연출하는 감각(sensation)을 그렸다.
이제 모네의 '지베르니 베르농미술관'은 세계인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
미술에세이를 쓰는 박인식은 지베르니정원을 직접 가보고 나서 모네 그림의 본질을 '음악'이라고 말하면서 이런 말 한마디 남겼다.
"아 이런 사랑이란 들을 수는 있어도 볼 수는 없는 추상인 것을"
시인 채호기(50)는 수련을 빛의 꽃으로 빛의 혀가 공기를 애무하면 투명한 공기들이 어느 순간 형체를 띠게 되고 그렇게 수련일 태어난다고 보았다.
수련 연작
수련은 또한 물의 꽃으로 밤새 물의 반죽으로 빚어낸 나체의 꽃으로 수련은 낮에 꽃잎을 활짝 펼쳤다가 밤이 되면 그 치마를 올린다. 그렇게 삼일낮밤 지새우고 생을 마감한다 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 밖에 그의 작품들]
'정원(뜰)의 여인들' 1866년작
이 작품은 화실 밖에서 제작된 최초의 대규모 인물구성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라 그르누이예르 유원지' 모네는 빛과 그림자를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그렸다고 할 수 있다.
'보트' 빛과 물의 순간적 흐름을 읽을 수 있다.
'기모노 입은 모네부인' 당시 프랑스사회의 일류(日流, 자포니슴)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랑드 자트 섬' 빛의 시간대별 번뜩임을 맛볼 수 있다.
'아르장 다리' 빛이 주는 최대의 효과를 잘 살리고 있다.
'파라솔 부인, 아내와 아들' 그의 그림은 눈이 부셔 눈을 뜰 수 없게 한다.
'봄' 이 작품을 보니 작가의 이런 말이 생각난다. "나는 작업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잊고 색의 비전을 재발견했을 때 가장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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