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와 숙녀(木馬와 淑女) / 박 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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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朴寅煥, 1926 ~ 1956)
강원도 인제 출생.
경성 제일 고보를 거쳐 평양의전 중퇴.
1945년 마리서사 (마莉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김기림.오장환.김광균 등과 알게 되었고, 김경린.김수영 등과 어울렸다.
1946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경향신문에 근무했다.
1949년, 김경린. 임호권. 박인환. 양명식 등 5인의 합동 시집인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모더니즘의 기수로 각광을 받았다.
박인환은 1930년대 김기림을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을 계승한
1950년대의 후기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존재이다.
이러한 후기 모더니즘의 형식적 새로움은
새로운 현실인식과 사회적 실천에서 불가피하게 태어난 것이 아닌,
현대 서구 문학의 학습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따라서 그 관념이 사회적 기반을 결(缺)하고 있다는 점에서
1930년대 모더니즘의 발전적 계승이 아니라는 비판이 있으며,
그것은 1940년대 말기의 명동 중심의 지적 풍토와 무관하지 않다
박인환은 <후반기> 동인이었으며,
대표작으로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 얼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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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비 문
인제가 낳은 시인 박인환은
1950년대를 극명하게 살다간 시인이다.
비록 31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온 몸으로 불태운 그의 시혼은
우리들 가슴속에 살아숨쉰다.
'세월이 가면' 의 박인환은
바로 우리 인제민의 영원한 반려자이기에
군민의 정성을 모아
여기에 시비를 세우고 기린다
(강원도 인제군 합강정공원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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